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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가는 어디로 가야 하나 -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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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21.07.20  12:1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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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뿌린 씨앗들(2)

 
박식과 정민은 동거하면서 작은 일이라도 서로 의논하는 사이가 되었다. 비록 결혼한 사이는 아니나 신혼처럼 사랑과 젊음을 불태우는 일을 주저하지 않았다.
긴장과 초조, 스릴의 연속인 충무 생활을 청산하고, 진주에서 새 둥지를 틀고 간판 일과 국전준비를 다시 시작했다.
전태식이 마련해 준 점포에서 간판 일로 생계를 꾸려가고 화가로서 기반을 구축해나갔다.
진주에서 안정을 찾아갈 때 가을 도전이 열렸다. 
박식은 도전 특선과 국전 입선 경력이 반영되어 도전심사위원으로 위촉되었다. 
이때 정민은 도전에 출품하여 입선을 했다. 특선도 가능하나 남의 눈치도 봐야 하므로 입선으로 만족했다. 
박식과 정민의 동거는 열정이 넘칠 때가 있었다.
“피임약은?”
약을 강조하면서도 촘촘하게 챙기지 못해 그만 임신하고 말았다.
미술활동에 간판 일로 아이를 키우는 것은 무리일진대 정민은 아이를 낳겠다고 고집했다.
아기를 키울 여유는 없으나 박식과 동거의 끈을 다잡는 고리가 될 수 있어 정민은 결심을 굳혔다. 
상철의 아이는 상철의 어머니가 키우고 있었다. 정민은 가끔 만나고 오는 정도였다. 
박식의 아이를 어떻게 키울지 출생 전에 생각해 봐야 했다.
 
미라가 서울로 이사하고 철쭉이 붉음을 토해낼 무렵, 박식의 국전 출품이 임박해 왔다. 
지방 미술협회 동료 5명이 출품하기로 했다. 함께 차를 대절하여 현대미술관에 출품하고 오후에 돌아오기 위해 새벽에 출발했다. 출품 협조를 위해 동료 한 명과 박식이 서울로 갔다. 박식은 서울 사정을 알아볼 참이었다.
서울 생활을 시작한 미라는 남편이 출근하면 서울의 명소를 찾아 구경하거나 지인들과 만나 외식을 하곤 했다. 
추석이 가까운 어느 날 오전 그녀는 덕수궁 석조전을 구경하고 있었다. 
“저 사람이 누구지?”
차에서 대형작품을 내리는 한 사람을 보았다.
박식이었다. 
한번 만나고 싶었던 차에 반가웠다. 출품하고 나올 때까지 기다렸다.
미라를 본 박식은 우연의 만남에 국전 출품을 알고 왔냐고 물었다. 
“그냥 고궁 구경하러 왔는데 이렇게 만나네요.”
미라는 ‘우연이 잦으면 필연이 되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서로를 망원경으로 봐주는 우주인이 있기라도 하단 말인가.
박식은 동료를 먼저 보내고 서울에서 하룻밤 자고 가기로 했다. 
박식은 종로 청진동 영남여관에 투숙했다. 
투숙 장소를 미라에게 알려주었더니 다음날 여관으로 찾아왔다.
이산가족도 아닌데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서로를 부둥켜안았다. 
처음 영화관에서 손잡았던 느낌이 살아났다.
폭풍이 배를 덮치는 광경.
욕망이 이성을 짓밟는 순간, 일은 번개처럼 일어나고 말았다.
박식의 인생에서 최대의 사건으로 기록되어야만 했다.
‘검사의 아내는?’
신문의 가십으로 등장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다음날 진주로 돌아와 국전 소식을 기다렸다. 
그런데 국전 발표는 출품자 전원이 낙선했다는 소식이었다.
일 년을 다시 기다려야 하는 안타까움으로 일손이 잡히지 않았다. 
이럴 때마다 재도전의 결심은 샘물처럼 솟았다.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막강한 검사의 아내와 만들었던 사건.
동거하는 정민을 임신시킨 사실.
불륜이냐 로맨스냐를 구분하는 것은 갑의 위치에 있는 자의 권한 같기만 하다.
그날의 일을 기억에서 지우려고 각오를 다졌다. 
정민에게만 집중하려 했으나 머릿속에는 오매불망 미라의 생각으로 가득 찼다.
세월이 약이라고 했던가.
정민에게 신혼의 사랑을 쏟았다. 그녀는 임신으로 몸이 무거워지기 시작했다. 박식은 다짐했다. 
‘정민에게 잘해줘야지.’
그런데 정민에게 하늘이 무너지는 소식이 왔다.
할머니가 키우던 상철의 아들이 교통사고를 당해 사망했다는 것이다. 
세상이 쉽게 무너지는 방법도 있구나. 
정신을 잃었는데도 정민은 배 속의 아기가 꿈틀거리고 있음을 느꼈다.
“그래, 나는 살고 말 거야.”
한 아이를 잃고 다른 한 아이를 키우겠다는 엄마의 본능이기도 했다.
 
호사다마
 
미라는 박식과의 하룻밤 추억을 잊을 수 없었다. 
고궁, 전시장을 돌아다니면서 마음의 평정을 찾으려 애썼다. 
남편은 새 정부 출범으로 폭증한 일을 처리하느라 쉴 틈이 없었다. 그럴수록 그녀는 더 외로워지면서 여자로서 초라함마저 느껴졌다. 
남편의 버팀목 덕분인지 친정아버지의 사업은 번창했다. 다소 위로가 되었다. 
승승장구하던 송 검사에게 사고가 발생했다.
강원도에서 일어난 정치사건을 처리하기 위해 경춘가도를 달리다가 차가 언덕 아래로 곤두박질쳤다. 가속으로 커브를 돌던 중 가드레일을 들이받고 추락한 것이다. 
운전사가 현장에서 즉사하고 송 검사는 중상을 입고 춘천병원에 입원했다. 
소식을 듣고 늦은 밤 병원으로 달려간 미라는 남편의 빈 병상만 보았다.
그는 서울의 큰 병원으로 옮겨졌다고 한다. 뇌를 크게 다쳐 춘천에서는 수술이 불가했기 때문이다. 
서울 S병원으로 온 그녀는 수술해 봐야 정확한 상태를 알 수 있다는 의사의 이야기만 들었다.
조금 후 시가와 친가 부모가 비슷한 시간에 도착했다. 
흐느끼는 소리가 들리는 중에 여섯 시간의 수술이 진행되었다.
“생명은 건졌습니다. 기억이 돌아올지는 조심스럽습니다.”
의사는 양가 부모 앞에서 너무 신중한 것 같아 미라의 가슴은 더욱 답답해졌다. 
 
그날부터 미라는 입원실에서 밤낮으로 환자 곁을 지켰다.
양가 부모는 지방으로 내려가고 혼자서 병간호를 했다. 기억을 살리지 못한 남편은 닷새째 되는 날 손가락을 움직이며 희미하게 눈을 떴다. 
미라는 반가웠다.
“여보, 정신이 드세요?” 
아무런 대답이 없자 그녀는 다시 풀이 죽었다. 
그녀는 아버지의 뜻을 거역하지 못해 송 검사와 결혼하여 이 지경에 이르렀다고 후회하는 바보가 되고 싶지 않았다.
지금은 남편의 병간호에만 집중할 때다.
밤이 되면 외로움이 몰려오고 왜 박식 생각이 날까? 
법과 도덕이라는 사슬과 가면을 걷어버리고 차라리 죽음을 택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에 자신을 의심해 보기도 했다.
문병객을 받는 자신의 처지가 원망스럽기도 했다.
열흘쯤 되자 환자가 말문을 열었다. 
“여기가 어디예요?”
“병원이에요. 서울의 병원. 정신 차려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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