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식과 상철은 친구 관계가 소원해지면서 상철은 하던 일자리도 그만두게 되었다. 별다른 기술이 없고 일이 끊기자 당장 생계가 막막해졌다. 

그러던 어느 날 상철은 선술집에서 박식을 만나 지난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다. 

“정민이 나와 살면서도 박식 너를 잊지 못하고 있어. 나를 원망하면서 아이만 없으면 갈라서고 싶다고까지 하네.”

상철의 말에는 시름이 섞여 있었다. 

박식은 이젠 상철과 정민의 문제에 관여하고 싶지 않았다. 

“지나간 일이니 나는 더 이상 생각하고 싶지 않아. 너희들이 행복하면 그걸로 족해. 그러니 지금부터라도 부인을 잘 다독여줘.”

‘부인’이라는 호칭을 붙이면서 박식은 진심을 담아 말했다.

상철은 후회하는 듯하지만 이제 되돌리기에는 불가능한 처지임을 깨달았다. 고향에서 생활비를 받아 겨우 생계를 유지하는 형편이다 보니 정민이 먹고 싶어 하는 과일이며 군것질도 양껏 사주지 못했다. 

 

무정한 세월이 흘러 정민은 이듬해 봄 귀여운 옥동자를 출산했다. 

아이는 이목구비가 수려하고 엄마, 아빠를 빼닮아 사내답게 생겼다. 

두 사람은 아이만 봐도 즐겁고 행복했다. 

그러나 현실은 냉혹하여 직장이 없으니 돈을 벌 수 없고 고향의 도움을 받는 것도 한계가 있었다. 

궁여지책으로 박식이 다니는 간판집에 다시 나가 예전에 하던 일을 하고 싶다고 애원했다. 사장은 상철의 딱한 사정을 듣고 다시 받아주었다. 

“저는 간판 일을 하고 애 엄마는 부엌일을 돕겠습니다.”

급한 불을 끈 부부는 한숨을 돌리자 다시 신혼의 상태로 돌아간 느낌이었다. 

박식은 상철과 같은 집에서 일하지만 만나는 일은 흔치 않았다. 박식은 작업장에서 글씨를 쓰고, 상철은 현장에서 간판을 달아주는 일을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서로의 묘한 감정은 아직 사라지지 않았다. 

 열심히 간판을 그리고 있을 때 박식은 전태식이라는 독지가로부터 뜻밖의 요청을 받았다. 

“우리 집에 와서 아이의 그림공부를 도와줄 수 없는가?”

당장 대답하라는 것이 아니고 시간을 두고 생각해서 연락 달라는 것이었다. 

전태식은 미술 재료점 주인으로부터 박식을 소개받았다. 

박식은 남해 출신으로 고교 졸업 후 진주로 와서 간판 일을 하면서 도 미술전람회에 출품하여 특선한 장래가 촉망되는 실력가로 머리가 명석하고 인물이 출중했다. 

박식의 행동이 민첩하고 성실해서 모범적인 총각으로 생각됐다. 

전태식에게는 과년한 딸이 있었다. 막내아들의 미술지도를 하게 되면 자연스럽게 집에서 자주 만나 서로 정이 들고 연애감정을 느끼면서 결혼까지 갈 수 있겠다는 생각으로 가정교사를 부탁했다.

박식은 전태식의 제안에 온종일 생각해 봤다. 

일주일에 두 번씩 밤에 와서 한 시간씩 지도하면 월급 50만 원을 주겠다고 했다. 그의 현재 월급보다 많은 액수였다. 

박식은 학생을 가르치는 건 좋은 일이고 학채도 많이 받으니 만족스럽고 해볼 만한 일이라 생각하여 허락했다. 

전태식의 속뜻을 모른 채 결정한 박식의 장래에는 어떤 변화가 올까?

 

박식은 간판 일을 끝마치고 전태식 집으로 갔다. 

첫날이라 가족과 인사했다. 어머니와 25세가량의 누나가 있었다. 

박식은 호기심이 발동했다.

“따님이 미인이시네요. 무엇을 하시나요?”

초면에 직업을 묻는 것은 실례지만 아가씨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표정으로 미소를 지었다. 

“초등학교 선생이에요. 전미라라고 합니다. 잘 부탁해요.”

식구들과 수인사를 한 후 박식은 학생 방으로 들어갔다. 

“성기야, 오늘부터 그림을 가르쳐주실 선생님이시다.”

어머니가 선생님을 소개했는데 아들은 이미 그림 그릴 준비를 해놓고 있었다. 

공부가 시작되기 전에 전미라가 인삼차를 들고 들어왔다.

찻잔을 받은 박식은 한 가지가 궁금했다.

“미라씨는 선생님이라 그림을 잘 그리실 텐데 왜 저를 부르셨습니까?” 

“아니에요. 저는 그림엔 소질이 없어요. 아버지께서 화가 수준의 선생님을 들이고 싶어 하시니까요.”

전미라는 온화한 성격에 말소리도 아름다운 일급 규수였다. 우윳빛 피부, 앵두 같은 입술, 반달 같은 눈썹, 살짝 들어간 보조개… 아름답고 매력적이었다. 

박식은 첫눈에 반해버렸다. 

그림을 대충 가르치고 돌아온 박식은 자신의 마음을 흔들어 놓은 전미라가 눈에 선했다. 내일이라도 당장 보고 싶었으나 격일 방문이라 하루가 열흘 같았다. 간판을 쓰면서도 머리에는 미라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다. 박식은 그녀 생각에 사로잡혀 간판 일을 조수인 김치로에게 맡겨 놓고 조퇴했다. 

 

허기가 져서 시장 안에 있는 비빔밥 식당에 들렀다. 

오른쪽 건너에 젊은 두 사람이 식사를 하고 있었다. 그들이 고개를 돌리는데 상철과 정민이었다. 이전 같았으면 질투심이 발동했을 텐데 전미라를 알게 된 뒤부터 정민은 안중에도 없었다. 

박식이 가까이 가서 말을 걸었다.

“상철아, 맛있게 먹어라.”

“그래, 고맙다. 혼자 왔냐?”

상철은 미안하다는 듯 물었다.

“그래, 혼자 왔어. 근데 아들은 어디 두고 너희들끼리 왔냐?”

“시골에서 할머니가 오셔서 보고 계셔.”

결혼 전 손자를 낳았으나 식구로 받아들여 내왕하면서 양가의 합의를 보았다고 한다. 박식은 차라리 잘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민이 상철의 아이를 낳았지만 박식은 정민에 대한 연민의 정을 청산하지 못해 밤이면 그녀 생각에 뒤척일 때가 많았었다. 그러나 이젠 미라가 그런 연민의 사슬을 풀어준 셈이다.

상철과 정민은 아들이 동쪽 방에서 태어났다고 하여 ‘동민’이라 이름을 지었다. 동민은 막 돌이 지나고 걸음마를 하는 귀여운 아이였다.

그들은 결혼식을 올리지 못했지만 양가의 합의를 거쳐 완전한 부부로 귀여운 아이를 기르며 행복한 나날을 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