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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가는 어디로 가야 하나 - 16청계 양태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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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22.02.02  21:4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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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밀의 공유

 
송 검사에게 어떤 변화가 있었는지 궁금했다.
그는 베테랑급 정치수사 검사로서 승승장구하며 중앙무대에서 핵심 실세로 떠올랐다. 미라의 얼굴이 상류 사교계에 알려지기 시작한 것도 일반적인 흐름이라 생각되었다.
미라한테서 전화가 왔다.
“우리 한번 만나요.”
간단하고 덤덤한 말이었으나 박식은 꼭 만나야 하는 어떤 의무감마저 들었다.
장충동 앰배서더호텔 커피숍에서 오전 11시에 만났다.
뜻밖의 약속이라 30분 앞당겨 약속장소에 갔다. 
미라 역시 약속시간보다 빨리 나타났다. 
오랜만이며 세월이 빠르다는 느낌을 인사말에서 공유했다.
“지난번 전시회를 위해 송 검사님께서 많이 도와주셔서 성공적이었습니다. 고맙다는 말 꼭 전해줘요.”
박식이 진심으로 감사했다. 
검사, 변호사의 참석으로 어느 전시회보다 빛난 것은 확실했다.
커피가 나오기 전에 미라는 하고 싶은 말을 꺼냈다.
“이번에 남편이 서울 동부지청장으로 승진 발령이 났어요. 지청에 장식용으로 박식씨의 그림을 걸었으면 하더군요.”
박식의 반응을 기다릴 때 커피향이 미라의 코에 걸렸다.
종업원이 커피를 가져온 것이다.
“몇 점이나 필요한가요? 그리고 크기는?”
“동부지청에 직접 방문하여 송 검사와 의논해보는 게 좋겠네요. 같이 방문하면 더 좋고요.”
그림 이야기는 커피 반을 마실 때 거의 끝났다. 
박식을 바라보는 미라의 눈에서 뭔가 말하고 싶다는 것이 느껴졌다. 
미라는 말문을 열었다.
“박식씨 우리 애 보셨죠? 느낀 점 없었어요?”
“전혀. 어떤 점이?”
“이목구비가….”
여기에서 미라는 말을 더듬고 있었다.
“박식씨를 닮았어요.”
그러곤 입을 다문 채 박식을 쳐다보았다.
박식은 머리를 망치로 한 대 맞은 것처럼 멍했다.
영남여관에서 있었던 그날의 포옹이 번개처럼 떠오르자 박식은 정신을 가다듬었다.
“송 검사는 알고 있나요?”
“남편은 눈치채지 못했어요. 알면 우린 죽습니다.”
등골이 얼마나 오그라들었는지 박식은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누가 옆에서 엿듣고 있는지 그는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동부지청을 방문하는 것은 일단 보류했다. 
지금은 위험하다고 박식은 느꼈다. 
며칠간 생각한 끝에 약간의 변장을 하기로 했다. 
아이는 박식을 닮아 눈썹이 짙다. 송 검사가 이런 박식의 모습을 보면 어떤 연상을 할지 모른다.
박식은 면도기로 눈썹을 희미하게 밀고, 눈가를 검은 섀도로 엷게 화장을 했다. 
그날 오후 4시경 미라를 앞세워 박식은 검찰지청을 방문했다.
“영화배우같이 미남이십니다.”
섀도 화장 덕분인지 송 검사는 박식을 처음 본 사람처럼 말했다.
비서가 가져온 차가 입에 닿기도 전에 그림 이야기가 먼저 나온 것은 미라가 구매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는 뜻도 있었지만, 남편이 박식을 오래 쳐다봄으로써 아들의 얼굴을 연상시킬까 하는 두려움이 있었기 때문이다.
분위기가 휑해 보이는 넓은 지청장실에 몇 점 걸어두면 좋겠다는 미라의 제안은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졌다. 
박식이 재료비 가격으로 작품을 공급하겠다고 하자, 송 검사는 “이왕 가져오시는 김에 열 점 정도는 준비하시죠.”라는 말로 일을 쉽게 결정했다.
현관에 대형그림 두 점, 각 검사실에 1점씩 걸기로 했다.
그림값은 지역 유지가 전액을 보조하겠다고 해서 만사형통이었다.
납품한 돈으로 아파트를 구입했다. 
정민과 아들에게 준 가장 큰 선물이 아닐 수 없다.
선물이 행복 제조기가 되길 바랄 뿐이다. 
 
박식의 서울 생활은 물 흐르듯 했다.
적어도 표면상으로는 그러했고, 그러해야만 했다.
산수화 수업을 받기 위해 평창동 청운 선생을 찾았다.
오늘의 가르침은 그림의 방향성에 관한 것이었다.
“산수화를 그릴 때 남화와 북화를 구분 지을 필요가 있네, 남화는 먹 선이 힘차고 굵으며, 북화는 선이 가늘고 정교하지. 결국 남화는 먹을 많이 쓰게 되고, 북화는 채색 위주로 그리게 되는 것이라네.”
집터를 잡는 것도 아닌데 선생의 방향 이론에 박식은 궁금증이 더해졌다.
“남화와 북화의 정신이 다르다는 뜻인가요?”
“남화는 사의(寫意)적 그림이고 북화는 사실(寫實)적 그림이지.”
“제가 그리는 것은 남화에 속하겠군요.”
“그렇지. 남화는 정신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북화는 사실을 존중한다고 볼 수 있지.”
그림 하나하나에 대한 지식이 늘어나면서 박식의 서울 생활은 점점 익숙해져 갔다. 
그림공부로 바쁜 중에도 미라의 아이가 불쑥불쑥 떠오르면 박식은 얽힌 수수께끼를 풀어야 하는 숙제를 안은 기분이었다.
미라의 아들, 아니 송치구의 아들 송민수의 운명이 어떻게 될까?
아니 박식의 아들이 어떻게 될까? 
인생은 수수께끼를 풀어야 하는 운명을 타고났는지 모른다.
 
후배 김치로 입성
 
진주 간판점에서 조수로 일했던 김치로가 서울에 와서 박식을 찾은 것은 이 무렵이었다. 
“형님, 저도 그림을 배워보고 싶습니다.”
“그림공부는 좋지만 생활비 조달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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